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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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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로니코스 2세는 1259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의 아들로 태어나,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번영기를 이끌었다. 그는 아버지의 교회 통합 정책을 재검토하고 정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회복했으나, 통치자로서의 능력 부족으로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의 치세 동안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용병 부대의 난폭함, 손자와의 내전 등으로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결국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폐위되어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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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게오르기오스 파키메레스의
게오르기오스 파키메레스의 "Historia" 원고의 세밀화
칭호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전체 이름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네노스 팔레올로고스 ()
왕조팔레올로고스 왕조
종교동방 정교회
출생일1259년 3월 25일
출생지니케아, 니케아 제국 (현재의 튀르키예 부르사 주 이즈니크)
사망일1332년 2월 13일
사망지콘스탄티노폴리스, 동로마 제국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탄불)
통치
즉위1282년 12월 11일
퇴위1328년 5월 24일
대관식1272년 11월 8일
선임 황제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후임 황제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공동 황제미카엘 9세 팔레올로고스
섭정1261년 (공동 황제로서)
섭정 형태선포
대관식 형태대관식
가족
아버지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어머니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배우자안나
욜란데 디 몬페라토
자녀미카엘 9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테오도로 1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시모니스 (시모니다 네마니치), 세르비아 여왕
이레네 팔레올로기나 (요안니스 2세 두카스의 아내), 테살리아의 세바스토크라토릿사

2. 생애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학식이 높은 황제로,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라 불리는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번영기를 이끌었다. 그는 아버지 미카엘 8세의 교회 통합 정책을 재검토하여 정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아토스 산의 수도원 활동은 그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부족하여, 미카엘 8세가 재건한 동로마 제국은 그의 치세에 쇠퇴하기 시작했다.[1]

서구에 대해서는 해군을 방치하여 지중해의 해양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오스만 제국오스만 1세 치하에서 비티니아 대부분을 정복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출신 탐험가 로제 드 플뢰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라곤 왕국 출신 용병들로 구성된 카탈루냐 용병대는 오스만 군을 격퇴했으나, 로제가 위협이 되자 1305년 미카엘 9세 등이 그를 암살했다. 이후 남은 용병들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유린하고 아테네 공국테바이를 정복했다.[4]

1320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으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반란을 일으켰다. 7년간의 내전 끝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승리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8년 폐위되었다. 1330년 수도사 안토니오스(Αντώνιοςel)로서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고, 1332년 사망했다.

2. 1. 탄생과 즉위 (1259년~1282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1259년 3월 25일 니케아에서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와 테오도라 팔라이올로기나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의 외조카였다.

1261년, 아버지 미하일 8세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은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으나, 1272년 11월 8일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12] 공동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아버지의 정책에 따라 로마 교황청과의 교회 통합을 지지해야 했다.

1278년, 미카엘 8세의 명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투르크의 진출을 막기 위해 출정했다. 그는 지역 주민들의 자체적인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난민과 주민들을 모아 36,000명의 병력으로 트랄레스에 요새를 건설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그가 귀환한 후 요새는 투르크에게 함락되었고, 더 많은 피난민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몰려왔다.

1282년, 투르크 정벌에 앞서 안드로니코스 2세는 반항적인 테살리아 공국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에 참가했다. 이 원정에서 그는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에서 미카엘 8세의 병사와 함께 황제 계승 자격을 얻었다. 황제가 된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가장 먼저 미카엘 8세의 시신을 가매장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미카엘 8세가 교회 통합 시도로 인해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시신이 훼손될 위험이 있었고, 교회로부터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12]

2. 2. 통치기 초반 (1282년~1299년)

십자군 잔존 세력, 베네치아 등의 상인 공화국, 동쪽의 투르크 부족, 독립적인 지방 세력, 북쪽의 세르비아불가리아 발흥 등 대내외적 문제가 산적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이 안드로니코스 2세의 의무였다.

1283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를 공격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이 지역을 탈환하려는 여러 시도 중 하나였다.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 미카엘 타르카네이오테스가 이끄는 군대가 진격했고, 알렉시오스 라울의 함대와 요안니스 시나데노스의 메가스 스트라토페다르케스가 합류했다.[1] 포위는 성공했지만, 전염병으로 미카엘 타르카네이오테스와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여 테살리아에서 철수했다.[1]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학예를 진흥하여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번영기를 이끌었다. 미카엘 8세의 교회 합동 정책을 재검토하여 정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회복했고, 아토스 산 수도원 활동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부족했고, 미카엘 8세가 재건한 동로마 제국은 그의 치세에 쇠퇴하기 시작했다.

서방에서는 해군을 방치하여 베네치아, 제노바 등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2. 2. 1. 종교 문제 봉합

미카엘 8세의 교회통합에 대해 찬반으로 나뉘어 동로마 제국은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특히 팔라이올로고스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아르세니오스파의 반발은 지방 곳곳에 자리해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즉위 후 미카엘 8세의 종교 정책을 백지화했다. 동서 교회의 통합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으며 정교회 전통의 전례가 다시 진행되었다.[13] 그러나 이를 정리하고 사태가 봉합된 것은 1310년은 돼야 했으며 역설적으로 이 때는 이미 동로마 제국이 아시아의 대부분을 상실한 후였다.[14]

1301년 그리스도 옆 안드로니코스 2세를 묘사한 황금칙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버지의 교회 통합을 파기하면서 친통합파 총대주교 요한 11세를 포함한 많은 교회 임명 인사들을 해임했다. 새로운 반통합파 총대주교 요셉 1세는 사임하고 다음 해에 사망했으며, 키프로스 출신의 인물이 그레고리우스 2세라는 이름으로 그를 대신했다.

안드로니코스는 또한 반통합 운동이었지만 황제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던 아르세니우스 분열에 직면했다. 이 운동의 이름은 미카엘 8세를 파문하고 요한 4세를 실명시키고 투옥한 후 축출된 전 총대주교 아르세니우스에서 유래했다. 아르세니우스파는 포로로 잡힌 요한이 정당한 비잔티움 황제이며 총대주교 요한 11세, 요셉 1세, 그리고 현재의 그레고리우스 2세는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그레고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들을 초청하여 이전의 친통합 선언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는 교회 공의회를 소집했다. 안티오크 총대주교는 거절하고 사임한 후 시리아로 도망쳤다. 그레고리우스는 또한 황후 테오도라에게서 사망한 남편 미카엘 8세에게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도록 요구하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서약을 받아냈다. 이 공의회는 정교회 성직자들을 만족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아르세니우스파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몇 년 후 그레고리우스 2세는 그의 저서 일부가 이단으로 간주되어 사임해야 했다. 악화되는 정치 상황에서 눈길을 돌리기 위해 안드로니코스가 선택한 그의 후임은 아토스 산의 은둔자로서 아타나시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새 총대주교는 매우 금욕적이었고, 세속적인 재산을 가진 성직자들을 비난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결국 부유한 교회와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려고 시도했다. 많은 성직자들은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를 걸어가는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경호원 없이는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1293년 여름 안드로니코스가 급속히 감소하는 아나톨리아 영토 방문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폐위를 요구하는 주요 성직자 대표단을 만났다. 안드로니코스는 꺼렸지만, 반대 세력의 강력한 압력으로 결국 응해야 했다. 한편 아타나시우스는 자신을 비난한 성직자들을 파문하는 교회 칙령을 직접 작성하여 성 소피아 대성당 북쪽 회랑의 기둥에 숨겼다. 몇 년 후에야 발견되어 큰 소란을 일으켰다.[8]

안드로니코스 2세는 높은 교양을 지닌 문인 황제로서 학예를 진흥했으며, 후에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라 불리는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번영기를 이끌었다. 또한 아버지 미카엘 8세의 교회 합동 정책을 재검토하여 정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회복했고, 그의 치세하에 아토스 산의 수도원 활동은 한때 전성기를 맞았다.

2. 2. 2. 재정 문제

미카엘 8세의 콘스탄티노플 수복은 제국의 재건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동쪽 방어와 서쪽 진출을 위해 키운 군사력은 아시아 주민들의 희생으로 유지되었고, 재건 비용과 외교 비용 역시 그들의 몫이었다. 니케아 제국부터 80년간 이어진 부담은 한계에 이르렀고, 결국 재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군을 해체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285년, 용병과 전문 군인, 해군의 2/3가 해체되었고, 그 빈자리는 함대와 난민들로 채워졌다. 이는 이후 전란에서 효율적인 방어를 어렵게 만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15][16]

즉위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버지의 정책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1285년, 그는 황실 함대를 해체하여 제노바 공화국에 대한 해상 의존도를 높였다.[1]

국고 개선을 위해 비잔티움의 히페르피론을 평가절하했지만, 국고 수입은 이전의 7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세금 인상과 세금 면제 축소는 가뜩이나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1]

1291년, 나폴리의 샤를 2세가 니케포로스 1세 콤네노스 두카스와 동맹을 맺자, 시칠리아 섬의 만종 이후 잠잠했던 비잔티움 제국의 우려가 다시 커졌다. 비잔티움 군대가 에피로스로 파병되어 1292년 요아니나를 포위했고, 제노바 함대는 아르타에 접근했다. 그러나 아카이아 공작의 접근으로 군대는 북쪽으로 후퇴했고, 함대는 약탈 후 출발했다. 이 전쟁은 제국의 자원을 소모시켰지만,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1]

안드로니코스 2세의 군사 정책은 제국의 재정적 제약에 의해 결정되었다. 국고는 비어 있었고, 미카엘 8세의 계획은 더 이상 달성 불가능했다. 안드로니코스는 아버지의 군사 정책을 이어가려 했지만,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국가 재정 지출을 삭감해야 했다. 토착군은 상징적인 수준으로 감축되었고, 외국 용병대와 민병대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경험 없는 민병대는 투르크의 진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비잔티움 해군은 완전히 해산되었고, 제국은 제노바와 베네치아 함대에 의존하게 되었다. 해고된 비잔티움 선원과 조선공들은 아나톨리아 해안의 투르크멘족에게 고용되었고, 이는 에게 해에서 터키 해적 문제의 증가와 무역로, 해안 지대의 황폐화를 야기했다.[7]

1320년, 세금 증액과 엄격한 징수 정책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1년에 100만 히페르피론을 확보했다. 그는 이 돈으로 기병 3,000명과 함선 20척을 건조하여 비잔티움 해군을 재건하려 했으나, 안드로니코스 3세와의 내전으로 중단되었다.[4] 참고로, 1320년의 히페르피론은 바실리우스 2세 치세의 노미스마 순금화의 절반 가치였다.

1321년 국가 예산 추정치는 다음과 같다.[7]

1321년 국가 예산 추정치
예산 항목추정 총액 (백만 하이퍼피라)
근위대
병사
노젓는 사람
육군 보급품
해군 보급품
사료 및 말
카탈루냐 용병단 원정
민정 경비
합계


2. 2. 3. 서방 문제

세르비아라틴계 공국들과 연합하여 마케도니아 등 제국의 영토를 위협했다. 동로마 현지군은 세르비아를 상대로 효율적으로 맞서 싸우기 어려웠고, 투르크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군을 동쪽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5살의 어린 딸 시모니스를 40세의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과 혼인시키는 동맹을 추진했다. 시모니스의 지참금은 세르비아가 점유한 영토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최소한 밀루틴이 살아있는 동안 서쪽은 안정되었다.[17][18]

제노바와의 동맹으로 인해 제국은 1296년부터 1302년까지 베네치아와의 무의미한 전쟁에 휘말렸다. 제노바는 1299년에 베네치아와 화해했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전쟁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쟁을 계속했다. 1302년 전쟁이 끝날 무렵, 다른 전선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자원의 손실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1][2]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버지 미카엘 8세가 창설한 해군이 쇠퇴하는 것을 오랫동안 방치했기 때문에, 당시 지중해의 해양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 등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게 되었다.

2. 3. 통치 중반 (1299년~1321년)

높은 교양을 지닌 문인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학예 진흥에 힘써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라 불리는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번영기를 이끌었다. 아버지 미카엘 8세의 교회 합동 정책을 재검토하여 정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회복했고, 아토스 산의 수도원 활동은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부족하여, 미카엘 8세가 재건한 동로마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1]

서구에 대해서는 해군을 방치하여 지중해의 해양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1296년부터 1302년까지 벌어진 베네치아와의 전쟁은 제노바와의 동맹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자원 낭비만 초래하고 끝났다.[1][2]

오스만 제국오스만 1세 치하에서 비티니아의 거의 전역을 정복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출신 탐험가 로제 드 플뢰르의 도움을 요청했다. 아라곤 왕국 출신 용병들로 구성된 카탈루냐 용병대는 오스만 군을 무찔렀으나, 로제 드 플뢰르가 위협이 되자 1305년 미카엘 9세와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후 카탈루냐 용병대는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유린하고 아테네 공국테바이를 정복했다.[4]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0년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으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반란을 일으켰다. 7년간의 내란 끝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승리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8년 폐위되었다. 1330년 수도사 안토니오스(Αντώνιοςel)로서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고, 1332년 사망했다.

2. 3. 1. 아시아에서의 개혁 시도

1299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투르크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직업군인들에게 토지를 보장하고 부패를 혁신하는 재무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대토지 소유자들은 반대했고, 이들의 음모로 인해 1300년 개혁은 백지화되었다. 그 결과, 아시아 지역은 다시 불만과 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3]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는 1260년대부터 튀르크의 공격을 받아왔기 때문에, 안드로니코스 2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소아시아를 자주 순회하며 주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요새들을 복구했지만, 유럽 영토로 유입되는 난민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293년, 알렉시오스 필란드로페노스가 아이오니아 해안을 제외한 소아시아의 모든 군대를 지휘하고 통치하도록 임명되었다. 그는 유능한 장군으로, 1294년과 1295년에 메안드로 계곡의 튀르크인들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튀르크인 포로가 너무 많아 노예 가격이 양보다도 낮아졌다고 하며, 일부 튀르크인들은 항복하여 필란드로페노스의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알렉시오스 필란드로페노스의 승리는 중앙 정부의 무능한 튀르크 위협 대처, 높은 세금과 대조를 이루었고, 특히 크레타 출신 병사들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알렉시오스는 최고 지도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크레타 출신 병사들은 봉급을 받았지만, 소아시아에 정착하면서 토지를 소유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조건으로 토지를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295년 말, 필란드로페노스는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도전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필란드로페노스에게 카이사르(Caesar) 직위를 제안했지만, 알렉시오스는 너무 늦게 행동했고 지지 기반이 약화되었다. 네오카스트라 총독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충신인 리바다리오스는 크레타 병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알렉시오스를 눈멀게 하고 체포했다. 이후 크레타 병사들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다만, 요한 6세는 1320년 정계에 등장하기 전에 "크레타에서 온 군대"가 정착했다고 알려진 트라키아의 어떤 마을을 언급했다.

필란트로페노스의 뒤를 이어 안드로니코스 2세의 사촌이자 아르세니테파였던 요한 타르카네이오테스가 아나톨리아에 파견되었다. 요한의 임무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지역의 군사 및 경제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프로노이아(Pronoia) 소유지를 잃었고, 일부는 상관에게 뇌물을 주어 소유지를 늘리고 병역을 중단하기도 했다. 요한은 이러한 부패를 종식시키기 위해 메안드로 계곡(Büyük Menderes River|Meander Valley) 주변의 재산 소유권을 재평가하는 엑시소시스(exisosis)를 실시했다. 아나톨리아에서 요한의 개혁은 성공적이었으며, 군대를 재건하고 소규모 함대를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책의 주된 표적이었던 아나톨리아의 대지주들과, 폐위된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한 교회로부터 반대에 직면했다. 타르카네이오테스가 직면한 적개심은 소수의 프로노이아 병사들이 필라델피아(Alaşehir|Philadelphia)의 반(反)아르세니테파 주교 앞에 요한에 대한 반란 혐의를 제기하면서 폭발했다. 1300년경 이러한 반역 혐의가 제기되자, 타르카네이오테스는 테살로니키(Thessaloniki)로 도망쳐 안드로니코스 2세와 합류했다. 타르카네이오테스의 개혁은 고위 성직자와 지주들의 반대라는 강력한 압력으로 인해 곧 폐기되었다.

2. 3. 2. 무력 해결 시도와 실패

1302년, 근위대장 무잘론과 공동 황제 미카엘 9세에게 각각 병력을 주어 니코미데이아와 마그니시아를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무잘론은 아트만에게 패했고, 미카엘 9세는 마그니시아를 버리고 서쪽으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아시아 주민들에게 패배주의가 확산되었고, 대규모 피난과 행정 붕괴를 야기했다.[19][20]

1303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시아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군인들에게 나눠주려 했으나, 실행할 사람이 없어 실패했다. 제국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는 도시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다.[19][20]

1296년부터 1302년까지 벌어진 베네치아와의 전쟁은 제노바와의 동맹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자원 낭비만 초래하고 끝났다.[1][2]

소아시아에서 튀르크족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바페우스 전투에서 패배하자, 비잔티움 정부는 로제 드 플로르가 이끄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잔혹함과 배신으로 인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황폐화시키고 아테네 공국테베를 정복했다.

아나톨리아 베일릭은 계속해서 비잔티움 영토를 침략했다. 부르사는 1326년 오스만 튀르크에게 함락되었고, 안드로니코스 2세 치세 말까지 비티니아의 상당 부분이 오스만 1세와 오르한 1세에게 넘어갔다.[4] 카라시드는 1296년 이후 팔레오카스트론이 있는 미시아 지역을 정복했고, 게르미얀은 1328년 시마브를, 사루한은 1313년 마그네시아를, 아이딘은 1310년 스미르나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오스만 1세 치하에서 비티니아의 거의 전역을 정복하자, 안드로니코스는 카탈루냐의 탐험가 로제 드 플뢰르의 도움을 요청했다. 로제의 용병 군단은 오스만 군을 무찔렀지만, 로제가 안드로니코스에게 위협이 되자 1305년 미카엘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2. 3. 3. 카탈루냐 동지회 고용

1303년 겨울, 안드로니코스 2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베네치아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을 받아 카탈루냐 동지회를 고용했다.[21] 1304년 초, 이들에게 키지코스 수복 임무가 주어졌으나, 이들은 제국 장교의 통솔을 거부하고 오히려 키지코스를 약탈했다. 또한 투르크족을 몰아내는 대신 동로마 관료나 교회를 상대로 약탈을 자행했으며, 1304년 10월 에페소스가 함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고용주의 도시인 마그니시아를 포위 공격하기까지 했으나, 겨울이 다가오자 포위를 풀고 귀환해 휴식을 취했다.[22][23]

1305년, 카탈루냐 동지회의 지휘관 로제 드 플뢰르가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 미카엘 9세에게 암살당하자, 남은 용병들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유린하고 아테네 공국테바이를 정복했다.

2. 3. 4. 트라키아 황폐화와 튀르크의 도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즉위한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대외 확장을 시도했다. 미카엘 9세는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나, 알란족 용병들의 원한으로 카탈루냐 동지회의 지도자 루지에로가 암살당했다. 이에 카탈루냐 동지회는 갈리폴리반도를 약탈하고 아라곤 왕국의 영토로 선포했다. 이들은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튀르크 족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튀르크 족의 유럽 진출이 현실화되었다.[24][25][26][27]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제노바 공화국의 도움으로 튀르크 족의 도해를 저지하고 트라키아에 대해 청야작전을 펼쳤다. 카탈루냐 동지회는 도시와 요새 공격에 실패하고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 아테네 공국에 고용되어 테살리아 공국을 공격했으나 1311년 아테네 공국을 정복했다.[24][25][26][27]

2. 4. 통치 후기 및 말년 (1321년~1332년)

1312년부터 1321년까지 동로마 제국은 이미 많은 영토를 잃은 후였기에 더 이상의 충격적인 손실은 없었다. 그러나 피해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불가리아, 테살리아 등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카탈루냐 동지회의 피해로 인해 금본위제 대신 은본위제를 도입해야 했다.[28][29]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학예를 진흥시켜 비잔티움 문화의 마지막 번영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또한 정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회복하고 아토스 산 수도원 활동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부족하여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서구에 대해서는 해군을 방치하여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지중해 해양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오스만 제국오스만 1세비티니아 대부분을 정복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로제 드 플뢰르가 이끄는 카탈루냐인과 아라곤 왕국 출신 알모가바르 혼성 용병을 고용하여 오스만 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로제가 위협이 되자 1305년 미카엘 9세 등이 그를 암살했다. 남은 용병들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유린하고 아테네 공국테바이를 정복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와 황위 계승권을 두고 갈등을 겪다 내전을 치렀고, 결국 1328년 폐위되었다. 1330년 수도사 안토니오스(Αντώνιοςel)라는 이름으로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고, 1332년 사망했다.

2. 4. 1. 미카일 9세의 죽음과 의절

미카엘 9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적장자이자 공동 황제로 제국의 계승자였다. 미카일 9세의 아들, 즉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인 안드로니쿠스 3세는 정부(情婦)가 바람이 났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분노하여 자객을 보냈는데, 이 자객이 실수로 안드로니코스 3세의 동생 마누일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미카엘 9세는 와병 중에 절명하고 말았다.[30][31]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에 매우 분노하여 손자 안드로니쿠스 3세를 원로원총대주교 앞에서 의절을 선언하고 계승권을 박탈했다. 그 자리는 미카일 9세의 동생이자 다른 아들인 콘스탄티노스에게 주어졌다.[30][31]

2. 4. 2.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란과 내전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하자 이에 반발하여 132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32] 1321년 부활절에 감옥에서 탈출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와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의 조력을 받아 트라키아 지역의 세금 면제를 약속하며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선전포고했다. 귀족 사회의 젊은 세대가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지하며 반란에 동참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파문과 무력 진압을 시도했으나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협상에 나섰다.[32]

1321년 6월 6일, 안드로니코스 3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고 아드리아노플을 수도로 삼아 제국의 서쪽 절반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외교 및 국방 정책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했고, 6개월 뒤인 12월에 내전이 다시 일어났다. 1322년 7월, 2차 평화협정을 통해 안드로니코스 3세가 차기 대권자로 확정되었고, 3년 뒤인 1325년 2월 2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협정은 준수되었다.[32]

7년간 이어진 내전은 결국 안드로니코스 3세의 승리로 끝났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폐위되었고, 1330년에는 수도사 안토니오스(Αντώνιοςel)로서 은둔 생활을 강요당했으며, 1332년에 사망했다.

2. 4. 3. 말년의 위기와 퇴진 종용

1319년부터 포위되었던 푸르사1326년 7년간의 포위 끝에 오스만의 후계자 오르한 1세에게 항복했다.[33] 테살로니카 시장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챤스키의 도움으로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33] 1321년부터 1328년까지 7년간 내전이 계속되었지만, 1328년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가 승리하면서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폐위되었다.[34] 그는 퇴위 및 수도원으로의 퇴진을 종용받았고, 속세의 이름을 버린 채 안토니오스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되었다.[33] 1332년 2월 13일 그는 딸 시모니스와의 마지막 저녁 식사 후 조용히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숨을 거두었다.[33][34]

3. 평가

안드로니코스 2세는 그의 긴 통치 기간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3. 1. 호의적 평가

동로마 제국의 몰락은 대외 정치적 어려움과 이전 황제인 미카엘 8세의 과도한 긴장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반발이 군사적, 재정적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여 현명한 조치들을 취했다.[35]

그러나 당시 상황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들은 제한적인 효과만을 거둘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얻은 효과들도 이후 사건들로 인해 무효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학문과 문학에 큰 관심을 기울여 콘스탄티노플이 정치적으로는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의 지적 중심지로 남을 수 있게 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35]

3. 2. 부정적 평가

안드로니코스 2세는 거의 반세기 동안 제국을 통치했지만, 시대에 맞지 않게 역대 황제들 중 가장 허약한 황제였다. 그는 아버지 미카엘 8세의 외교술, 아들 미카엘 9세의 용기, 손자 안드로니쿠스 3세의 패기 중 어느 것도 갖추지 못했다. 만약 그가 장기적인 안목이나 명확한 정치적 목표를 가졌다면 제국의 쇠퇴를 막았을지도 모른다.[36] 그의 치세 동안 백성들은 적에게 포위되고, 기아에 허덕이며, 무거운 세금에 시달렸다.[36]

그는 서구에 대해서는 아버지 미카엘 8세가 창설한 해군을 오랫동안 방치하여, 당시 지중해의 해양 국가였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제노바 공화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졌다.

오스만 제국오스만 1세 치하에서 비티니아의 거의 전역을 정복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출신 탐험가 로제 드 플뢰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제의 지휘 아래 카탈루냐인과 알모가바르로 구성된 용병이 오스만 군을 격퇴했지만, 로제는 1305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 미카엘 9세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로제의 용병 군단은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유린하고 아테네 공국테바이를 정복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황위 계승권을 박탈했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0년 반란을 일으켰다. 7년간의 내전 끝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승리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8년 폐위되었다. 그는 1332년 사망할 때까지 수도사로서 은둔 생활을 했다. 이처럼 용병 부대의 난폭함과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란은 이미 약화되었던 동로마 제국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4. 가족

안드로니코스 2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헝가리의 안나(안나)[9]로, 1273년 11월 8일에 결혼했다. 안나는 헝가리의 스테판 5세와 쿠만의 엘리자베스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다.

이름출생-사망
미카엘 9세 팔라이올로고스1277년 4월 17일 ~ 1320년 10월 12일
콘스탄티노스 팔라이올로고스약 1278년 ~ 1335년



1281년 안나가 사망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1284년 몽페라토의 이레네(욜란다 (이레네로 개명))와 재혼했다. 이레네는 몽페라토의 윌리엄 7세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
요한 팔라이올로고스약 1286년 ~ 1308년
바르톨로마이오스 팔라이올로고스1289년 출생, 요절
테오도로스 1세1291년 ~ 1338년
시모니스 팔라이올로기나1294년 ~ 1336년 이후
테오도라 팔라이올로기나1295년 출생, 요절
데메트리오스 팔라이올로고스1297년 ~ 1343년
이사키오스 팔라이올로고스1299년 출생, 요절



안드로니코스 2세는 혼인 외에도 최소 세 명의 딸을 더 두었다. 이들은 왕의 딸 4명 중 3명이 몽골 칸과 결혼하여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10]


  • 이레네: 페르시아의 칸 가잔(가잔)과 결혼했다가, 이후 테살리아(테살리아)의 통치자 요한 2세 두카스(요한 2세 두카스)와 결혼했다.
  • 마리아: 황금 호드(황금 호드)의 칸 토크타(토크타)와 결혼했다.
  • 데스피나 카툰: 일 칸국(일 칸국)의 칸 올제이투(올제이투)와 결혼했다.

참조

[1] 서적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 - 145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7
[2] 서적 Constantinople and the Latins: the foreign policy of Andronicus II, 1282-1328 Harvard University Press 1972
[3] 논문 Cretans in Byzantine foreign policy and military affairs following the Fourth Crusade 2012
[4] 백과사전
[5] 논문 The tombs of the Palaiologan emperors 2018
[6] 서적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145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2
[7] 서적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8] 서적 Byzanz: Verfall und Untergang Econ GmbH 1998
[9] 서적 The Shorter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 II.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62
[10] 서적 Byzantium and the Turks in the Thirteenth Centu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11] 웹사이트 Holy Andronicus II Palaeologus Byzantine emperor https://www.britanni[...]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문서 아라곤 왕국, 카탈루냐, 나폴리 왕국, 베네치아, 제네바, 동로마 제국 관련 내용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문서 1312년, 카탈루냐 동지회의 반란 관련 내용
[27] 서적
[28] 서적
[29] 문서 제국 금 보유량 및 통화체계 관련 내용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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